남한산성의 순교자

교회측 자료(증언 기록) 15위

성명 세례명 순교일(음력) 순교형태 나이 거주지 비고(관변기록='관')
한덕운(韓德運) 토마스 1801.12.27 참수 50 광주 의일리 충남 홍주 태생

<사학징의> : 덕운(德運)

포도청에서의 진술

“저는 본래 홍주(洪州) 사람으로 경술년(1790년) 10월에 진산(珍山)에 사는 윤지충(尹指忠, 바오로)의 집에 갔다가 처음으로 십계에 대해 배우고 여러 해 동안 깊이 빠졌습니다. 저는 작년(1800년)10월에 광주 땅 의일리(義一里) 의일리 : 지금의 경기도 의왕시 학의동(鶴儀洞). ‘의일’의 한자가 본래 의일(儀逸)이지만, 문초 과정에서 잘못 기록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곳은 본래 경기도 광주(廣州)의 의곡면 의일리였다. 로 이주하였으며, 교회의 동정을 살피고자 하여 지난 3월 사기그릇 행상인으로 꾸미고 서울로 올라오던 길에 빈 가마니 안에 담겨 있는 시신을 보고 ‘이것이 누구의 시체이냐?’고 묻자, 곁에 있던 사람이 홍낙민(洪樂敏, 루가)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교우들과 서로 사랑하던 마음이 지극하였던 관계로 이 말을 듣고는 아주 놀라고 비통하여 그의 원통한 죽음을 애도하였습니다. 또 홍재영(洪梓榮, 프로타시오)등이 배교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가 부친을 따라 함께 죽지 아니한 것을 엄하게 질책하였습니다. 이어 서소문 밖으로 가서 최필제(崔必悌, 베드로)의 시신을 염해 주었습니다. 이 마당에 이르러 만만코 배교할 마음이 없으며, 오직 빨리 죽기를 원하는 것 외에는 다시 아뢸 말이 없습니다.”

판결시의 진술

“윤지충에게 천주교 서적을 배워 밤낮으로 익히고 여러 해 동안 빠져 있었으며, 윤지충이 참수를 당한 뒤에도 두려워하거나 그만둘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도중에 홍낙민을 애도하였으며, 최필제를 살펴 염해 주었고, 홍재영의 배교를 도리어 질책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제가 천주교의 교리를 깊이 믿으면서 이를 가장 올바른 도리라고 여긴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니, 지금에 와서 형벌을 당한다고 어찌(신앙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바꿀 생각이 있겠습니까? 오직 빨리 죽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권1, pp148-150>

<순교실록>

형조에서 사실대로 자백한 천주교 신자를 참수형에 처하도록 아뢰기를, “죄인 한덕운은 윤지충에게서 처음으로 천주교를 배웠으며, 홍낙민의 원통함을 애도하였으며, 최필제의 시신을 염해 주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참수형에 처하되, 다른 도(道)에 사는 사람은 각각 해당 도로 압송하여 형벌을 적용하도록 하였다.

<순조 원년 12월 26일 무진>

김덕심(金德深)
(본명 萬集)
아우구스티노 1841.01.28 옥사 43 광주 구산 김성우 성인의 아우

그가 순교한 뒤, 시신은 큰 아들 원희(元熙)가 찾아다 구산에 안장하였다.

후손들의 증언 자료

정여삼 바오로 1866.10 옥사(?) 45 용인 삼베일 충남 천안 직산 태생
(관 정오복鄭五卜)

① 정여삼은 본래 직산 사람으로, 용인 삼배일(三拜일, 현 용인시 이동면 덕성리)로 이사하여 살다가 이화실과 함께 치명하니, 나이는 45세였다.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42번

② 정여삼은 충청도 천안 사람으로, 용인 삼배일로 이사하여 살다가 병인년(1866년) 10월에 광주 포교에게 잡혀 광주로 가서 치명하였다.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60번
<병인박해 치명사적 권1, p. 54, p. 68>

(정덕구 야고보는) 정덕구(야고보) : 정여삼(바오로)의 조카로, 삼촌과 함께 남한산성에 갇혀 있다가 동생 마티아와 함께 탈출하여 충청도 공주의 국실 점촌에서 살았으며, 그곳에서 1867년 11월 10일 죽산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죽산 관아로 끌려갔고, 20일 후에 옥사로 순교하였다.

용인 샘배울(즉 삼배일) 점촌에 살았는데, 병인년 군난 때인 10월 20일 저녁에 광주 포교 세 패가 들어와서 체포하였다. 그 때 야고보의 삼촌(즉 정여삼 바오로)과 조모와 동생(즉 마태오)과 온 식구가 모두 잡혔으며, 영세 예비하던 이 서방(즉 이화실)도 잡혔다.

(포졸들은) 그들을 한 방에 넣고 이 서방과 야고보 두 사람의 다리를 함께 대어 쇠고랑으로 채우고, 손도 고랑으로 채운 뒤 몽둥이로 두들기면서 “돈을 내라”하고 “당도 대라”하였다. 두 사람이 대답하되, “돈은 내가 있는 대로 줄 테지만, 내가 죽더라고 당은 안 대겠다.” 하였다.(그러자 포졸들은) 대라고 하면서 더욱 두들기니 정신이 아득하여 말도 못하였다.

그 무렵에 포교들이 야고보 삼촌(즉 바오로)을 몽둥이로 두들기면서 “너도 당을 대라” 한즉, 대답하되 “나도 대지 못 하겠다.” 하였다. 포교들이 더 두들기면서 대라 한즉 정신이 없어 아무 말도 못하고 죽은 모양으로 있으니, 포졸이 할 수 없이 매를 놓고 그쳤다.....(야고보와 동생 마태오가 숨어살 때) 삼촌과 이 서방의 소식을 들은 즉 두 사람이 다 치명하였다고 하였다. 한편의 마음은 즐겁고 다른 한편의 마음은 슬프기 한량없었으나, 그것도 주님의 명이라 생각하고, 집안 온 식구가 공론하기를 ‘그 두 사람은 치명하였으니 남은 식구나 살아 보세’ 하였다.......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164번>

이화실 1866.10 옥사(?) 40 용인 삼베일 충남공주관불산태생
(관 이장복李長卜)

이화실은 본래 공주 관불산(현 충남 공주시 유구면 녹천리의 옹기점 교우촌) 사람으로, 용인 삼배일로 이사하여 살다가 병인년(1866년) 10월에 광주 포교에게 잡혀 광주에서 치명하니, 나이는 40세였다.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번호 42번
<병인박해 치명사적> 권1, p.53

尹서방 1866.11 옥사(?) 45 이천 동산리

① 윤 서방은 본래 이천 동산 밑(경기도 이천시 호법면 동산리) 살다가, 병인년(1866년) 풍파 때인 11월에 광주 포교에게 잡혀 광주로 가서 치명하였다.

② 윤 서방은 본래 이천 동산 밑 살다가, 병인년 11월에 숙질 두 사람이 광주 포교에게 잡혀 광주로 갔는데, 그 조카는 석방되고, 윤 서방은 치명하였다.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32번
<병인박해 치명사적> 권1, p.47

정은 바오로 1866.12.08 백지사 63 이천 단내 정규량 신부의 증조부
(관 정성재鄭成才)

① 이천 단내(현 이천시 호법면 단천리) 지방에 살다가 병인년 11월 13일(체포 날짜)에 광주 포교에게 잡혀 치명하였다.

<치명일기>, 정리 번호 405번.

② 정(은) 바오로라 하는 이는 경기 이천 단내 지방에서 살 때 병인년 풍파를 당하였으니, 나이는 60여 세였다. 곳곳에 포졸이 매우 많음에 그 아들 필립보(즉 차남 정수동)가 간청하여 말하기를, “아무리 생각하여도 부친께서 피신함만 같지 못하다.”고 하니, 대답하여 이르기를 “나의 다리 힘도 부족하고 또한 신도 없을뿐더러 피한다 해서 무엇에 쓰겠느냐? 이런 때를 당하여 애주(愛主) 치명함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편안한 마음으로 움직이지 않고 부동하고 있다가 과연 동짓달 13일을 당하여 그 지방 전후 좌우로 포졸이 들어와 체포하니, 집안 식솔들은 이웃 외인 집으로 피신하였다. 포졸이 바오로에게 형벌을 하려 한 즉, 그는 분명히 말하기를, “나는 성모를 (공경)하는 몸이니, 내 가산은 적몰하여 너희들이 차지할지라도 내 몸을 해치지는 말아 달라”고 하였다. (포졸들은) 과연 그 말과 같이 가산을 적몰해 갔다.

광주 포도청에 갇힌 지 20여 일 만에 그 사위 박 요셉(즉 박공관)과 먼 친척 박선여 한 명이 함께 밤을 타고 옥채로 들어가 친한 포교 우두머리에게 석방해 주기를 청하니, 포교 우두머리가 이르기를 “벌써 알았더라면 구원을 요청할 것인데, 이제는 이미 옥졸과 옷을 바꿔 입었고 죽이기로 판결하였으니, 석방할 길이 없다”고 하였다. 이에 ‘그러면 죽인 후 시신 버린 곳에 표나 해달라’하고 왔다. 그 후 시체는 표한 것을 보고 그 아들이 시신을 거두어 안장하였다고 한다. 지금 아들 필립보는 충청도 충주 청용(현 중원군 소태면 중청동) 지방에 살고 있다.

<병인치명사적> 권23, pp.158~159.

정양묵 베드로 1866.12.08 백지사 이천 정은 바오로의 재종손
(관 정원명鄭原明)

① 바오로의 재종손이다. 베드로는 자원하여 그 재종조와 함께 치명하였다.

<치명일기>, 정리 번호 406번.

② 정 베드로는 바오로의 재종손이다. 저의 재종조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의관을 갖추어 가려한 즉, 그 아내가 옷을 붙들고 간절히 만류함에 옷을 떨치며 이르기를, “재종조도 체포되셨거니와 이런 때를 당하여 예수의 표양을 본받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고 나가 자원으로 체포 되었다. 바오로와 서로 권면하며 함께 치명한 사실도 전한다.

<병인박해 치명사적> 권23, p. 160.

이(李) 요한 1866 교수 38 광주 먹방리 죽산 남광리 태생

① 본래 죽산 남광리(현 안성시 삼죽면 남풍리의 남광)사람이었다. 병인년(1866년)에 광주 포교에게 잡혀 여러 교우와 함께 치명하니, 나이는 38세였다.

<치명일기>, 정리번호 407번

② 요한은 본래 경기 죽산 남광리 사람이었다. 그 부모가 문교하여 수계하므로 함께 수계하였고, 고향을 떠나 광주 먹방리(현 광주시 실촌면 곤지암리의 묵방리) 산곡에 가서 농사를 지어 생활하다가 병인년 풍파에 피신하여 충주로 가서 숨어 있다가 광주 포교에게 잡혔다. 관장이 묻되, “네 천주학을 하느냐”하니, “과연 천주 성모를 받드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네 배운 것을 읽어라”하니, 문답과 십이단 경문을 관장과 모든 사람 앞에서 크게 외우고, ‘죽어도 천주는 배반치 않겠다.’하면서 두려운 기색이 없이 옥에 가서 있었다. 후에 여러 교우가 잡혀 들어와 함께 교(絞)하여 죽으니, 나이는 38세였다.

<병인박해 치명사적> 권23, p. 10

오(吳) 안드레아 1866 교수 34

① 본래 양성 사람으로, 광주 포교에게 잡혀 교하여 치명하니, 나이는 34세였다.

<치명일기>, 정리 번호 408번

② 안드레아는 본래 양성 사람이었다. 부모의 교훈을 받아 성교 도리를 잘 배워 열심 수계하고, 농사로 생활하며 부모께 효도하였다. 병인년(1866년) 군난에 부모와 함께 피하였다가 잠깐 본 집에 간 있었는데, 그때 마침 광주 포교에게 잡혔다. ‘부친과 당을 대라’ 하며 혹형이 무수하였지만, 한 사람도 대지 아니하다가 혹형을 참지 못하고 유감을 입어 살 생각으로 굴복하였다. 그렇지만 본관으로 끌려가 (받은) 관장 문목에서는 이전의 뜻을 뉘우치고 죽기로 고복하여 설명하였다. 한 달 동안 옥에 가두었다가 교하여 죽으니, 나이는 34세였다.

<병인박해 치명사적> 권23, pp.59~60

서(徐) 아우구스티노 1866.02(?) 장사 38 광주양지 태생,신부(神父)댁 주인
(관 서태순徐泰淳)

① 본래 양지 사람으로, 신부댁 주인하다가 광주 포교에게 잡혀 매맞아 치명하니, 나이는 38세였다.

<치명일기>, 정리 번호 409번

② 아우구스티노는 본래 경기 양지 사람이었다. 부모의 교훈을 받아 열심 수계하며, 산곡에서 농사를 지어 생활하였다. 광주 땅에 살 때는 제 집에 신부를 뫼셔 1년을 지냈고, 이웃 사람에게 타당히 수계하도록 권하였으며, 빈궁한 사람을 만나면 불쌍한 마음이 간절하여 많이 구제하여 힘입는 자가 많았다. 병인년(1866년) 군난에 신부는 먼저 경포에게 잡혔고, (아우구스티노는) 피하여 다른 동네에 가 있다가 광주 포교에게 잡혔다. (포교들은) 신부댁 주인임을 알고 ‘혹 재물이 있는가’ 하여 죽이기로 결심하고 무거운 곤장을 때렸으나, 그는 이를 참아 받고 장폐(杖斃)하여 죽으니, 나이는 38세였다.

<병인박해 치명사적> 권23, pp. 60~61

이종여 1866.02(?) 장사 24 충북 진천 신부(神父)댁 주인
(관 이조여李祖汝)

① 진천 사람이었다. 병인년(1866년)에 광주 포교에게 잡혀 그 장인과 함께 매맞아 치명하니, 나이는 24세였다.

<치명일기>, 정리 번호 410번

② 종여는 본래 충청도 진천 사람이었다. 소년 시절에 문교하여 착실히 수계할 마음으로 처가로 들어갔으며, 열심 수계하고 본분을 지키며 날을 지냈다. 병인년 군난에 광주 포교에게 온 동네 여러 교우가 함께 잡혔다. ‘책과 당을 대라’하지 (이종여는) 한 사람도 대지 아니하고, 본관 앞으로 가서 그 장인과 함께 장폐하여 죽으니, 나이는 24세였다.

<병인박해 치명사적> 권 23, pp. 61~62

홍성국 요한 1867.04 56 광주 새말 양주 일담리 태생

① 본래 양주 일담리에서 대대로 살아오던 사람으로, 광주 정임 새말(지명 미상)에서 우거하다가 정묘(1867년) 4월간에 본음 포교에게 잡혀 치명하니, 나이는 56세였다.

<치명일기>, 정리 번호 411번

② 홍 요한 성국은 본래 양주 일담리에서 대대로 살아오던 사람으로, 광주 정임 새말에서 우거하여 살다가 정묘 4월간에 본읍 포교에게 잡혀 치명하니, 나이는 56세였다.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144번
<병인박해 치명사적> 권1, 87쪽

광주부 옥사자
12명
1867.01.09 이전 옥사
광주부 옥사자
4명
1868.01.04 이전 옥사
이(李) 요한 1869.02 50 광주 먹방리 포천 태생

이 요한은 본래 포천에서 대대로 살던 사람으로, 광주 먹방리로 이사하여 살다가 기사년(1869년) 2월에 광주 포교에게 잡혀 치명하였다. 그러나 치명일은 알 못하며, 나이는 50세였다.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77번
<병인박해 치명사적> 권1, 87쪽

이치재 1871.09.06 40 광주 새말 포천 솟다리 태생

① 본래 포천 솟다리 사람으로, 광주 정임 새말로 이사 가서 살다가 신미년(1871년) 9월 초6일(양력 10월 19일) 본읍 포교에게 잡혀 치명하니, 나이는 40세였다.

<치명일기>, 정리 번호 412번

② 이치재는 본래 포천 솟다리 사람으로, 광주 정임 새말에 우거하여 살다가 신미년 9월 초6일 이정귀와 광주 포교가 함께 와서 잡아 광주에서 치명하니, 나이는 대략 40세였다.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144번
<병인박해 치명사적> 권2, p. 144

서(徐) 바오로 미상 50 양지 정쇠

서 바오로는 양지 정쇠(현 용인시 내사면 정수리) 사람이온데, 자원하여 광주 포교에게 잡혀 치명하였다는 말을 들었으며, 나이는 50세였습니다.

<병인박해 치명사적> 권23, p.108

교회측 자료(가전 전승 기록) 6위

성명 세례명 순교일(음력) 순교형태 나이 거주지 비고(관변기록='관')
김준원(金俊遠) 아니체토 1845.12(혹은 1866) 광주 하우현 김선영 신부의 증조부

하우현(下牛峴, 현 의왕지 청계동) 마을에 살던 김준원(아니체토)이 1845년 9월에 역시 광주 포교에게 잡혀 그 해 12월에 남한산성에서 치명하였다.

<한국교회사연구소, “교회와 역사” 74호, 1981. 10, 5쪽 ; 93호, 1983. 3, 5쪽>

김윤심(金允深)
보명 文集
베드로 1868.02.15 68 광주 구산 김성우 성인의 아우

‘문(文)자 집(集)자’ 할아버지는 병인박해 때까지 계속 옥에 계신 걸로 우리는 알고 있고, 그 ‘문자 집자’ 아드님이 ‘경(敬)자 희(熙)자’ 여요. 그리고 형님의 아드님, 맏형의 아드님, 그 사촌의 아드님, 이렇게 아들, 조카들이 병인박해 때에 붙잡혀 함께 있다가 순교하신 걸로 들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敎)자 익(翼)자’ 할아버지가요, 양가로는 안당(즉 김성우 안토니오)이 할아버지이고, 친가로는 ‘문자 집자’가 할아버지입니다. 그런데 병인군난 때 문자 집자 할아버지는 계속 옥에 계셨고, 그 아드님 ‘경자 희자’와 손자 ‘교자 익자’ 3대가 다 잡혀 갔답니다. 같이 옥고를 치르는데, 형 집행하는 날이 닥쳐 가지고서 포교나 형리들이 우리 집안을 잘 안답니다. 근데, 할아버지. 아들. 손자가 한 날 한 장소에서 목을 치게 되었다. 이렇게 되었어요. 그래서 포교가 어린 손자 ‘교자 익자’의 등을 밀어 제쳐서 순교를 못했다. 이렇게 전해 옵니다. 그리고 ‘교자 익자’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그 참에 할아버지. 아버지와 함께 순교하지 못한 것에 가책을 받으며 사시다가 돌아가셨답니다.

‘교자 익자’ 그 할아버지가 세 분의 유해를 사흘에 걸쳐 밤이면 몰래 한 사람씩 업어다 둘째 할머니네 마루 밑에 안치했다가 장사지냈다 합니다. 그러니까, ‘교자 익자’ 그 분의 직계만 시체를 모셔왔지요. 당시 할아버지 ‘문자 집자’와 친아버지 ‘경자 희자’와 양아버지 ‘성자 희자’요.

후손들의 증언 자료

김성희(金聖熙) 암브로시오 1868.02.15 54 광주 구산 김성우 성인의 외아들

1841년 부친인 김성우가 순교하자, 그 시체를 구산 가족 묘지에 안장하고, 가족들과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한편, 그는 한의학을 공부하여 약국을 경영하면서 약값이 없는 불우한 사람을 도와주기도 하였고,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데도 힘을 기울였는데, 족보에는 ‘약국 할아버지’로 기록되어 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난 뒤 그는 사촌 동생 차희. 경희. 윤희, 양자 교익과 함께 광주 포교에게 잡혀 남한산성 감옥에 갇히었다. 관장은 그에게 배교를 강요하며 모진 형벌을 가하였으나, 그는 굽히지 않고 옥에 갇혔다가 1868년 2월 15일(양력 3월8일) 53세의 일기로 순교하였다.

후손들의 증언 자료

김차희(金次熙) 1868.02.15 40 광주 구산 김덕심의 차남
김경희(金敬熙) 1868.02.15 54 광주 구산 김윤심의 외아들
김윤희(金允熙) 1868.02.15 35 광주 구산 김성희의 6촌 형제

관찬 자료(《광영계록》)에 이름만 언급된 22위 * : 교회측 자료 순교자와 동인인물로 추정

* 서태순(徐泰淳) *이조여(李祖汝), 22 이학록(李學祿), 23 이정현(李正鉉), 24 엄쾌길(嚴快吉), 25 서상철(徐相哲), 26 이기좌(李奇佐), 27 권경보(權京甫), *김준원(金俊元), 28 오선장(吳善長), 29 김하상(金夏商), *정원명(鄭原明), *정성재(鄭成才), 30 한동원(韓東源), 31 이재금(李在琴), 32 한경조(韓敬祚) 이상 16위 1867.01.09 이전 옥사

* 이장복(李長卜), *정오복(鄭五卜), 33 윤재현(尹在鉉), 34 김상희(金尙喜), 35 송일지(宋一知), 36 송칠지(宋七知) 이상 6위 1868.01.04 이전 옥사